올해 전주에서 소개되는 거장들의 면면은 무척 다채롭다. 현재 가장 주목받는 작가부터 사망하고도 꽤 시간이 지난 이들의 영화까지, 세월을 초월한 영화들이 포진돼 있다.
미국의 거침없는 작가 아벨 페라라는 지난 한 해 동안 2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시베리아>는 눈으로 뒤덮인 산속의 조용한 바에서 일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로, 그는 가끔 환상인지 모를 림보 상태에 빠진다. 형이상학적이고 순수한 판타지의 이미지가 두드러진다. <토마소>는 로마에 체류 중인 한 미국 감독의 삶을 다룬다. 소소한 일상을 즐기며 살던 감독은 아내가 외도하는, 현실인지 환상인지 모를 모습을 보고는 평정심을 잃게 된다. 두 작품 모두 페라라의 페르소나인 윌럼 더포가 주연을 맡았다.
<홀아비의 탱고와 뒤틀린 거울>은 2011년 사망한 칠레의 거장 라울 루이스의 ‘신작’이다. 1967년 촬영된 이 영화는 미완성으로 남아 있었지만 아내이자 편집자인 발레리아 사르미엔토의 힘으로 50여 년 만에 결국 세상의 빛을 보게 됐다. 파블로 네루다의 시에서 제목과 그 정신을 차용한 이 작품은 자살한 아내의 유령에 시달리는 한 남자를 그린다. 다큐멘터리의 새로운 차원을 열었던 프랑스 크리스 마커 감독의 1977년작 <붉은 대기>도 소개한다. 이번에 소개하는 버전은 그의 탄생 99주년을 맞아 디지털 리마스터링된 것. 1960년대와 70년대 유럽과 남미 등지에서 벌어진 정치적 투쟁을 기록한 이 영화는 새로운 좌파의 탄생을 사적 에세이 형태로 보여준다.
일본의 스와 노부히로 감독은 영화가 제의(祭儀)로서 기능한다는 것을 신작 <바람의 목소리>를 통해 증명한다. <바람의 목소리>는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의 상처를 히로시마 원폭의 상흔과 쿠르드족의 상실감과 연결하는 이야기다. 소녀 하루가 고향을 찾아가는 여정을 함께하는 로드무비인 <바람의 목소리>는 한 소녀의 성장담이자, 대지진 피해자들을 기리는 일종의 ‘의식’과도 같은 영화다. 특히 영화 후반부 하루가 죽은 자들과 통화할 수 있다는 ‘바람의 전화’를 들고 통화하는 롱테이크 장면은 그 제의(祭儀)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다.
아르헨티나의 거장 에드가르도 코사린스키의 <마르가리타의 선율>는 93세의 피아니스트 마르가리타 페르난데스에 관한 독창적인 다큐멘터리이며, 캐나다 드니 코테 감독의 <윌콕스>는 사회규범을 벗어난 조용한 방랑자의 이야기를 파격적인 영화 문법으로 그려낸 극영화다. 칠레의 감독 이그나시오 아구에로의 <나는 결코 프로빈시아에 오른 적이 없다>는 급격한 외적 환경의 변화와 삶의 변하지 않는 가치에 관해 질문하는 다큐멘터리이며, 피에르 레옹, 히타 아제베두 고메스, 장 루이 쉐퍼가 함께 연출한 <죽음의 무도, 해골 그리고 환상들>은 흑사병 시대 유행하기 시작한 ‘죽음의 무도’가 15세기 유럽 근대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라는 작가이자 철학가 장 루이 쉐퍼의 가설을 바탕으로 유럽 이곳저곳을 다니며 촬영한 다큐멘터리 영화다.
글_문석 프로그래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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