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파괴력을 담은 영화다 (구혜선 감독)
2018-05-06 17:52:00

구혜선은 쉬지 않는다. 영화와 드라마를, 연기와 연출을, 책과 그림을 동시다발적으로 쓰고 그리고 찍는다. 그녀가 연출한 최신작 <미스터리 핑크>는 기획 회의 하루, 촬영도 하루, 후반작업도 하루, 총 3일만에 걸쳐 완성한 단편영화다. “제작비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3일을 넘길 수 없었다”지만 첫 단편영화 <유쾌한 도우미>(2009) 이후 지난 십 년 동안 꾸준히 메가폰을 잡은 결과, 이제는 서로를 너무 잘 아는 스태프들 덕분에 진행 가능했던 스케줄이기도 하다. “잠자는 시간 빼고는 생각하고 움직여야 하는 사람인데 가만히 있으라고 하면 마음이 아프다. (웃음)”

몸과 마음이 괴롭다고 느껴질 때 병원에 누워 시나리오를 구상했다는 <미스터리 핑크>는 열린 결말을 넘어 관객이 자유롭게 이야기와 주제를 해석해볼 여지를 남기는 영화다. 극중 주인공의 상황, 대사, 화면을 구성하고 있는 거의 모든 요소가 구체적인 정보를 제공하기보다는 가족애, 죽음, 사랑, 애증과 같은 관념들이 여자, 립스틱, 하이힐, 분홍색 문과 같은 구체적인 대상을 통해 상징화된다. 시나리오를 읽은 배우들이 하나같이 “어렵다”고 느끼자, 그녀는 이 영화가 “연애할 때의 구속감이나 애증 등 사랑의 파괴력을 담은 영화”라고 설명하며 배우들이 현장에서 느끼는 감정을 자유롭게 표출하기를 원했다. “배우로서 연기할 때 도구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내가 연출하는 현장에서만큼은 그들을 구속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스케치만 하고 색칠은 배우들이 하도록 맡겼다.”

사실 <미스터리 핑크>는 구혜선 감독이 한국에서 여성으로 살아가는 것의 무게 혹은 페미니즘에 관한 고민을 담은 영화이기도 하다. “어떤 무엇도 되고 싶지 않을 때가 있다. 성별, 직업, 인격 등 답이 정해져 있다고 여기는 것들로부터 자유롭고 싶다. 내가 생각만큼 그로부터 벗어나 살지 못할 때 창작을 통해서 조금 숨통이 트이는 것 같다.” 구혜선 감독은 한편 꽤 오랫동안 연기 외에 여러 활동을 통해 “하고 싶은 것 이상으로 많은 것들을 이뤄냈고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고 여겨지지만 때로 허무할 때도 있다”고 말했다. 그것은 아마 어디에도 얽매이고 싶지 않은 그녀의 자유를 향한 갈망의 다른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단편이든 장편이든 어떻게 해야 더 많은 사람들에게 지속적으로 이전 영화를 소개할 수 있을까, 일종의 플랫폼에 관한 고민이 많다”는 그녀는 차기작으로 뱀파이어 이야기를 영화화할 생각이다. 이미 시나리오집 <마리 이야기&미스터리 핑크>으로 엮어내기도 했는데 인간과 공생하는 뱀파이어가 소년의 성장을 지켜보는 이야기다. “<렛 미 인>(2008)보다는 한국적인 정서가 강한 영화가 될 것 같다.” 잠시도 쉬지 않고 무언가를 쏟아내는 그녀의 열정을 담은 <마리 이야기>를 극장에서 볼 날이 머지않았다.

글 김현수·사진 박종덕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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