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두 개의 원이 있다. 하나는 산 자들이 죽음에 이르는 원이며, 또 하나는 죽은 자들이 삶에 이르는 원이다. 두 개의 원이 만나는 순간이 곧 죽음과 삶 사이의 경계가 될 것이다. 소쿠로프는 자신의 영화에서 죽음에 대한 두 개의 이미지를 끌어 들인다. 그 하나는 아버지의 죽음이며, 다른 하나는 어머니의 죽음이다. 아버지의 죽음은 흑백필름으로 다루어졌으며, 어머니의 죽음은 컬러 필름에 담겼다. 죽음의 순간을 다룬 영화에는 소쿠로프 자신의 영혼이 죽음을 받아들이는 형태와, 세상에 대한 그의 정의 형상이 담긴다. 아들은 아버지의 부음을 듣고 고향에 돌아온다. 장례식이 집행되고, 시신이 담긴 관이 차가운 땅에 묻힌다. 아들은 아버지의 죽음을 무기력하게 받아들여야만 한다. 그리고 돌아온 집에서 기다리는 것은 이제는 세상에 없는 아버지의 텅 빈 방뿐이다. 소쿠로프는 아버지를 잃어버린 아들의 망연자실함 그 자체를 다루고 있다. 그래서 거의 정지된 듯한 카메라 앞에서 세상의 흐름이 멈추어 선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소쿠로프는 그 안에서 일체의 표현을 멈추고 마치 기록하듯 그 과정을 따라간다. 페레스트로이카가 실패로 돌아가고, 러시아가 서로 다른 나라로 산산 조각나는 미묘한 시기에 만들어진 이 영화에서 아버지의 죽음과 아들의 망연자실함은 그 모든 것의 비유인 동시에 어떤 것의 비유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