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상수 감독의 세 번째 영화는 그의 일관된 주제에 대한 반복이자 변주이다. 더 나아가 그 사실이 영화 안에서 그 자체로 하나의 방식이자 자기 반영의 의지로 드러난다는 점에서 새로운 시작이다. 마르셀 뒤상의 작품에서 가져온 영어제목은 영화의 줄거리이자, 동시에 영화의 화법이 입체적 구성의 주름처럼 접혀 있음을 보여준다. 방송국에서 구성작가로 일하고 있는 수정은 프로듀서인 영수의 소개로 화랑을 경영하는 후배인 노총각 재훈을 만난다. 재훈은 수정을 만난 날 이후 그녀와 섹스를 나누기 위해서 몇 차례에 걸쳐 설득한다. 그러나 수정은 아직 한 번도 경험이 없다는 이유로 거절한다. 이 사실을 알고 영수도 기회를 노린다. 수정은 몇 차례의 거절 이후 재훈과 섹스를 한다. 처녀막을 상실한 침대 시트의 피를 보고 재훈은 좋은 남편이 되겠다고 맹세한다. 수정은 그 말을 믿겠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약속이 지켜질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쓸쓸한 겨울 날씨의 서울을 무대로 흑백필름으로 촬영된 화면은 주인공들의 불투명한 관계처럼, 세 사람 사이의 마음의 풍경을 을씨년스럽게 담아내고 있다. 그들의 마음 사이 관계를 통해서 홍상수는 다시 한 번 이들의 시시한 일상생활을 무료하게 담아낸다. 권태로운 삶은 다섯 부분으로 나뉘고, 그 안에서 다시 장이 나뉘어 1부와 3부, 2부와 4부에서 같은 이야기를 다른 방향에서 다시 반복한다. 그러나 5부가 단 한 번만 보이는 것은 다른 방식으로 전개해도 결국 같은 결론에 도달하는 이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운명론적인 비극의 표현이다. 홍상수는 점점 더 자신의 영화 속 주인공들의 운명을 순종적으로 다루면서도, 그 반대로 점점 더 그 운명을 부수는 방향으로 보여주고 있다. 홍상수는 우리 삶이 담고 있는 부조리와 운명 사이에 놓인 긴장관계를 통해서 위기에 도달한다. 그 위기 안에서 우리는 무심하게 살아간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상처의 아픔이 일상화된 우리에게 삶의 칼날을 일깨우는 영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