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X전주국제영화제] #3 인터뷰: <미망> 김태양 감독
2024-05-05 00:00:00

<미망> 김태양 감독, “우리는 매일 같은 것 같아도 조금씩 달라진다”

1막. 그림 배우러 다니는 남자(하성국)는 여름 한낮의 종로 한복판에서 아는 여자(이명하)와 우연히 만나 잠시 길을 걷는다. 2막. 몇 년 뒤 여자는 폐관을 앞둔 서울극장을 찾고 극장 관계자인 남자(박봉준)와 함께 그림 배우던 남자와 거닐었던 그 길을 다시 걷는다. 3막. 어느새 화가가 된 남자(하성국)는 지인의 장례식에서 아는 여자와 재회하고 둘은 서울의 밤거리를 배회하다 익히 아는 카페를 찾는다. 두 남녀가 몇 년에 걸쳐 같은 공간을 거닐다 헤어지는 조각들을 담은 <미망>은 심심하게 반복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안엔 많은 차이들이 숨겨져 있다. 날씨, 건물, 의상, 대화 등의 미세한 차이는 일상이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무의미한 시간이 아닌 매일 무언가가 일어나고 있는 생동의 시간임을 증명한다. 그리고 그 차이들은 개개인의 기억에 침투해 “나의 연인과 친구, 내 삶을 떠올리게 하는(김태양 감독)” 촉매제가 된다. 첫 장편 데뷔작 <미망>이 한국경쟁에 올라 전주국제영화제를 찾은 김태양 감독은 거리의 영화를 찍은 연출자답게 전주 곳곳을 부지런히 산책하며 일상의 신비를 수집하고 있었다. 그를 직접 만나 “시와 같은 영화”를 찍으면서 있었던 일에 대해 들었다.

-독특하고 힘겨운 4년간의 제작과정을 거친 걸로 알고 있다. 서울극장에 가던 이명하 배우(여자 역)와 길에서 마주친 게 영화의 시작이었고 당시 다니던 미술학원에서 배운 4가지 원칙(지울 수 없게 펜으로 그릴 것, 틀리더라도 그대로 두고 계속할 것, 한 번에 할 수 있는 만큼 선을 최대한 길게 쓸 것, 시작하면 반드시 완성할 것)을 영화 만들기에 적용했다고.

그렇다. 그날의 우연한 만남을 일기로 적었는데 영화가 될 것 같았다. 그 글을 바로 이명화 배우에게 보냈고 2달 뒤에 촬영을 시작했다. 장편을 염두에 둔 건 아니었는데 찍고 나니 남녀가 각자의 시간을 보낸 뒤 재회하는 이야기가 떠올라 길게 가고 싶었다. 그런데 제작비 문제가 있었고 코로나까지 터져 이어 나가기 어려운 상황이 됐다. 그래도 곧잘 받아들여졌다. 완성하겠다는 원칙을 반드시 지킬 생각이었으니까. 2019년 여름에 1막, 2022년 여름에 2막, 2022년 12월 3막까지 해서 4년이 걸렸고 결과적으로는 그만큼의 시간과 공간의 변화를 담았으니 잘됐다 싶다. 영화 전반에 내 경험뿐만 아니라 실제 다 친한 친구들인 출연 배우들의 에피소드가 다 섞여 있다. 예컨대 관객들이 재밌어해 주시는 이순신 동상에 관한 일화는 대학 동문(건국대학교 영화과)이자 모르는 게 없는 하성국 배우와 나눴던 대화를 가져온 것이다.

-남녀가 걸었던 종로 일대가 구체적이고 생생하다. 거리에서의 촬영이 쉽지 않았을 텐데 어땠나.

즉흥적으로 찍었을 것 같지만 거의 모든 걸 통제했다. 비가 올 경우와 안 올 경우에 대비해 시나리오를 여러 버전으로 준비했고 정확한 앵글까지 생각해서 콘티 작업을 했다. 스태프들과 테스트 촬영을 많이 가고 배우들과 동선대로 걸어보는 리허설도 다 해본 뒤 순서대로 찍었다. 그리고 카메라에 잡힐 가게 주인분들에게 출연 허가를 받기 위해 매일 인사드리고 행인들에게 촬영 공지를 하는 지난한 시간을 거쳤다. 특히 3막의 카페는 섭외를 위해 1년간 자주 다니면서 단골이 되는 물밑 작업을 벌였다. (웃음) 카페 사장님께서 영화가 만들어진 걸 뿌듯해하신다.

-사랑의 결실이란 결정적 사건이 아닌 그저 만났다가 헤어지는 소소한 순간에 주목한다. 후자에 무게를 둔 이유는 무엇인가.

사소하고 별것 아닌 것에 끌리는 편이라 그런 것 같다. 사랑이 이뤄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함께했던 시간이 사라지는 건 아니지 않나. 그 시간이 내게는 소중하다. 연인이든 친구이든 관계를 맺은 이들끼리는 자기의 마음, 감정, 습관을 서로 옮기기 마련이다. 지금은 만나지 않더라도 한때 나와 인연을 맺었던 사람들의 어느 한 부분에 내가 묻어있다고 생각하면 애틋해진다. 나는 그 애틋함이란 감정이 특별하고 좋다.

-빈티지하면서도 세련된 색감을 어떻게 잡았는지가 궁금했다. 에드워드 양의 <하나 그리고 둘>의 밤거리, <중경삼림>의 홍콩 도시 풍경이 떠오르기도 했다.

언급한 에드워드 양, 왕가위 그리고 허진호 감독님이 찍었던 90년대 필름영화 특유의 질감을 구현해 보고 싶어서 김진형 촬영감독과 많은 논의를 거쳤다. 그래서 색 보정 작업을 할 때도 밝게 가는 트렌드에 맞추지 않고 어두운 건 그대로 어둡게 두면서 깊이감과 무게감이 생기도록 했다. 모니터로 볼 때는 둔탁함이 덜 느껴져서 좀 아쉬웠는데 극장에서 보니 신성희 컬러리스트가 얘기한 대로 스크린 입자 때문에 옛날 느낌이 확 살더라. 그래도 언젠가 35mm 필름으로 찍은 <패스트 라이브즈>처럼 실제 필름 작업을 해보고 싶다.

-서울의 오래된 공간이 더 사라지기 전에 영화에 붙들어 놓고 싶어 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혹시 종로, 광화문 인근 동네에서 살았나.

지리산 부근에서 자랐다. (웃음) 극장도 없었던 시골이었는데 영화를 좋아해 비디오를 많이 빌려 봤다. 어렸을 때 친구들이랑 큰 도시의 극장에 갔는데 표 끊는 걸 해본 적이 없어서 덜덜 떨었던 기억도 있다. 서울에 가서 영화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 건 유하 감독님의 <비열한 거리>를 보고 나서였다. 극 중에 현장에서 영화를 찍는 장면이 있는데 영화감독(남궁민)이 너무 근사해 보였다. 서울에 와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넓게 펼쳐져 있던 경복궁 입구였다. 경복궁으로 서울스러움을 배워서인지 서울은 내게 깍쟁이, 회색 도시가 아닌 정감 있고 다채로운 공간이다. 특히 을지로~종로~광화문 일대는 몇십 년 된 가게와 젊은이들이 차린 힙한 가게가 공존하고 과거, 현재, 미래 그리고 많은 역사가 혼재되어 계속 흥미로운 공간이자 주제다. 그래서 차기작도 서울에 관한 내용으로 준비 중이다.

-어떤 작품일지 무척 기대된다.

결혼했다가 이혼한 <미망>의 두 남녀가 주인공이다. 남녀가 완전한 주인공도, <미망>과 세계관이 이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이들의 이혼을 말리려고 시골에서 올라온 할머니가 서울을 경험하는 이야기가 될 것 같다. 집필은 끝났고 내년 촬영이 목표다. 올해에는 <나만 아는 춤>이라는 단편 작업을 할 예정이다. 현대무용을 오래 배우고 춤 공연장에서 조감독을 할 만큼 춤을 좋아해서 이 경험들과 동경의 마음을 작품에 녹여볼 생각이다.

[글 이유채 / 사진 오계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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