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전주국제영화제 J레터의 Z입니다. 오늘은 “우리들의 J 리스트” 마지막 리스트를 전하는 날이에요. 전주국제영화제가 끝난 지 2주가 되어 가는데 여러분들은 어떻게 보내고 있으신가요? 저는 엊그제만 해도 제26회 전주국제영화제는 언제 시작하나 하다가 정신없이 영화제를 보내고 나니 ‘어라?’ 하는 순간 영화제가 끝나 다음 스텝을 준비하고 있답니다.
마지막 리스트를 전하는 것과 다음 스텝을 준비하는 것이 겹친 이 시점에 가장 적절한 작품은 뭘까 하다가 지난 J 리스트는 역대 상영작으로 채웠으니 이번엔 이번 제26회 전주국제영화제 상영작으로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열심히 시간을 쪼개며 작품을 찾고 찾던 중 어쩌면 지금의 우리와 시대에 가장 잘 맞는 영화를 발견했습니다. 바로 이번 전주시네마프로젝트 섹션의 <호루몽>! 저는 영화관에서 이 영화를 보지 못했지만 영화를 다 보고나니 영화관에서 정식 개봉한다면 꼭 스크린으로 다시 보고 싶은 영화가 되었어요. 그렇다면 어떤 점에서 이 영화를 마지막 우리들의 J 리스트에 넣게 되었을까요?
마지막 글인 만큼 잠시 우리들의 J 리스트 처음으로 돌아가 볼까요? 처음 독립영화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독립영화는 난해하고 어렵다는 이미지가 있지만 반대로 그렇게 난해하고 어렵게 보이는 시선과 속도에서 우리가 보지 못한 세상의 모습을 보게 해준다고 했었죠. 그게 때로는 우리의 삶에 위로를 준다고도 했습니다. 하지만 독립영화는, 아니 영화는 우리 삶에 위로만을 주기 위해서 있는 건 아닐 거예요. 우리가 영화에 위로를 받는 이유를 잠시 돌아본다면 남들이 보지 못한 ‘나’의 모습을 영화에서 보고 비슷하게 세상을 느끼는 누군가가 있다는 연대의 감정이 우리로 하여금 계속 삶을 살게 하는 힘을 주는 걸지도 모르겠어요. 그렇다면 영화는 어쩌면 누군가 이렇게 외치는 거 아닐까요? “여기 당신과 비슷한 삶을 사는 누군가 있으니 힘을 내요! 같이 함께 살아요!” 혹은 “당신이 모르는 ‘나’의 삶이 있어요. ‘나’의 삶을 이해해주고 받아주세요. ‘나’를 살게 해주세요!” 라고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오락영화 혹은 대중영화에서는 위와 같은 외침을 느끼기는 어렵겠지만 적어도 독립영화에서는 쉽게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한 외침을 듣고 우리가 스스로의 삶을 반추하고 바꿀 수 있는 기회를 갖는 것. 그게 우리가 영화를 보는 이유일 거라는 생각도 가끔은 듭니다. <호루몽>은 이런 의미에서 이번 J 리스트의 마지막 영화로 가장 적합한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지금까지 우리들의 J 리스트 영화들은 사실 픽션에 기반한 영화였던 것에 반해 <호루몽>은 다큐멘터리 영화예요. 저도 다큐멘터리 영화를 많이 본 것은 아니기 때문에 흔히 말하는 픽션 영화와 다큐멘터리 영화의 차이점이 뭐냐는 질문이 난감한데요. 굳이 비교하자면 다큐멘터리 영화는 픽션 영화와 달리 서사구조가 굉장히 단순한 경우가 많아서 단조롭고 그래서 더 호흡이 느리게 느껴집니다. 논픽션 즉, 있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화면에 담아낸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빠른 컷 편집이나 시시각각 변하는 화면 구도, 박진감 넘치는 서스펜스나 액션 등은 사실상 없어야 해요. 실제 사건이 있었던 장소를 직접 방문해 보는 관람객 혹은 방문객의 시선과 비슷한 카메라 시선, 그 시선을 설명하는 나레이션, 사건을 실제로 겪은 이들의 인터뷰 장면이 반복되는 경우가 많죠.
<호루몽>도 우리에게 익숙한 다큐멘터리의 문법을 사용하고 있는 다큐멘터리 영화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 다큐멘터리 문법이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는 영화이기도 한데요. 이건 관객이 계속해서 영화를 보도록 하는 자극들이 영화 곳곳에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호루몽>은 영화 제목부터 다른 의미에서 자극적인 영화예요. 영화의 제목인 호루몽은 ‘버리는 것’이라는 어원을 가진 곱창구이를 뜻하는 일본말로 과거 일본인들은 가축의 내장을 먹지 않고 버렸다는 것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최근 몇몇 미디어에서도 소개되었는데 일본의 곱창구이는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으로 자의적, 타의적으로 넘어간 조선인들에 의해 시작한 음식이죠. 시놉시스에서도 알 수 있듯 일본의 곱창구이이자 영화의 제목 호루몽은 다른 의미에서 현재 일본에 거주하고 있는 재일교포, 다른 말로 자이니치라고 하는 분들이 겪은 차별과 혐오의 역사에 대한 상징이라고 할 수 있죠.
이런 차별과 혐오의 역사를 재일교포 3세로 성공한 여성 사업가이며 지금은 사회운동가로 일본 사회의 혐오, 혐한, 차별 등에 맞서는 ‘신숙옥’님의 삶을 중심으로 <호루몽>은 풀어냅니다. 바로 이 신숙옥님이 그 자체로 관객에게 영화를 보도록 하는 하나의 자극인데요. <호루몽>은 겉으로 보기에 신숙옥이라는 개인이 왜 지금과 같은 삶을 살게 되었고 앞으로는 어떤 삶을 살 것인지를 보여주는 영화 같아요. 하지만 실제로 <호루몽>의 카메라는 일본 사회에서 자이니치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차별과 혐오를 당하고 있는 재일교포의 삶이고 그 삶에서 차별과 혐오가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지를 포착하고 있어요. ‘조선인’ 혹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신숙옥님이 당한 차별과 혐오는 관객들로 하여금 민족주의와 페미니즘 각각의 관점에서 분노하게 합니다. 왜냐하면 그 차별과 혐오는 단순히 신숙옥이라는 개인만이 당한 것이 아니라 관객 자신도 당하는 것 같거든요.
또 다른 자극은 우리에게 내재한 한일 양국의 역사적 관계에 의한 자극이에요. 한국은 좋든 싫든 교육, 매체, 정치 등을 통해 한일 관계에 대해서 알게 되죠. 이런 저런 자극을 받고 나면 <호루몽>의 이야기는 굉장히 가슴 아프다는 감정을 넘어 반일 감정을 들게 하죠. 누군가는 그런 감정을 거부하면서 영화의 내용을 왜곡‧날조되었다고, 더 나아가 아예 거짓말이라고 할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그런 모든 감정이 결국엔 지나치든 혹은 왜곡되었든 어떤 지점에서 <호루몽>은 민족주의와 맞닿는 부분이 있어요.
하지만 <호루몽>은 민족주의를 반복적으로 거부하고 있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오키나와 평화시위에 한국인이 왜 나서느냐는 비판에 대해서 재일동포 신숙옥님은 차별과 혐오에 저항하는 사람이 어떻게 다른 이들에 대한 차별과 혐오를 보고만 있을 수 있느냐고 반문합니다. 오키나와인들에 대한 일본 본토인들의 차별과 혐오가 재일동포에 대한 차별과 혐오와 다를게 없다는 것이죠. 또 일본 극우세력의 차별과 혐오에 지쳐 독일로 도망쳤을 때 마주한 홀로코스트의 흔적과 잔해는 인류 역사에서 반복되어온 차별과 혐오의 역사를 떠오르게 하고 오늘날 재일동포들에 대한 차별과 혐오가 홀로코스트와 다르지 않다는 걸 일깨워줍니다. 반복적으로 언급되는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 사건도 마찬가지이죠.
다르게 말하면 <호루몽>은 차별과 혐오라는 말로만 보면 명확하지 않지만 동시에 현실에서 굉장히 만연하고 명확하게 반복되고 있는 한국 사회의 차별과 혐오를 보게 해주죠. 중국인, 조선족, 여성, 장애인, 사회취약계층 등. 수많은 사회 계층, 성별, 사회적 배경 등에 대해서 너무나 쉽게 차별과 혐오를 내뱉는 우리의 모습. 그런 차별과 혐오를 못 본 척 지나가는 우리의 모습. 심지어 차별과 혐오를 가볍게 웃음거리로만 사용하는 우리의 모습. 단순히 재일동포들에 대한 혹은 일본 사회에서의 여성에 대한 차별과 혐오만 보여주는 게 <호루몽>의 진의는 아니라는 것이죠. 어쩌면 일상이라는 이름으로 우리가 보지 않는 혹은 보지 못하는 우리의 모습에서 차별과 혐오를 발견해 우리가 수치스러워 하고 바뀌어야겠다는 작은 의지 하나를 갖게 하고자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영화 한 편이 관객이라는 집단 모두를, 하다못해 관객 개인을 변화시키지 못할 거예요. 영화는 그저 현실의 일부분을 카메라로 보여줄 뿐이고 변화라는 것은 관객 스스로만이 할 수 있는 것이죠. 하지만 어느 순간 갑자기 어떤 영화가 보여주는 현실의 단면이 우리가 보고 있는 현실의 다른 부분을 채워준다면, 그래서 우리가 현실을 다르게, 그러니까 더 폭넓고 깊게 볼 수 있게 된다면 그 순간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바뀌게 되는 것 아닐까요?
2000년부터 올해까지 26회 동안 독립과 대안이라는 가치를 내세운 전주국제영화제에서만이 아니라 독립극장, 시사회, GV 등 다양한 장소와 행사에서 독립영화는 계속해서 외치고 있어요. 누군가가 자신을 보고 같이 얘기해주기를요. 전주국제영화제는 그저 이런 독립영화의 외침을 더 쉽고 많이 들을 수 있는 곳이죠. 전주국제영화제만이 아니라 일상에서 어느 순간 독립영화의 외침을 듣게 되신다면 그 때는 꼭 전주국제영화제와 우리들의 J 리스트의 기억을 떠올리며 한 번 쯤은 걸음을 멈춰주세요. 영화와 대화를 나눈다는 마음으로 더 치열하게 이야기를 들으려고도, 반박해보려고도, 보고 느낀 점을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려고도 해본다면 독립영화는 결코 죽지 않고 계속해서 극장에서 만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우리들의 J 리스트 4번째이자 마지막 이야기는 조금 두서없기도 하고 어렵기도 한 이야기였죠? 저도 막상 다 쓰고 나니 조금은 후회되는 감정도 드네요. 그래도 마지막이니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싶었어요. 전주국제영화제 J 레터의 우리들의 J 리스트는 여기서 끝이지만 여러분들만의 J 리스트는 계속해서 더욱 풍성해지길 바라면서 여기서 인사드릴게요. 다들 다음 독립영화에서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