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도 '불면의 밤' 부문에는 다양한 소장르의 영화들이 모여 있다. 살인자를 찾아내는 ‘후더닛무비 who-dunnit movie’에서부터 심리 공포물이나 쫄깃한 스릴러, 그리고 전성기 할리우드 시대에 오마주를 바치는 호러물까지 각각의 작품이 서로 다른 방식의 매력을 보여준다.
토마스 하디먼 감독의 데뷔작 <헤어콘테스트 살인사건>은 헤어 드레서들의 경연대회를 배경으로 한 혼종 공포영화다. 대회를 준비하던 중 한 헤어 드레서가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하고 대회장은 커다란 혼란에 빠진다. 이 영화의 카메라는 한정된 공간 속에서 한 헤어 드레서에서 다른 헤어 드레서(또는 스태프)로 우아하게 미끄러지듯 넘나들면서 서로의 관계를 폭로하고 살인의 배경이 될 만한 단서를 던진다. 끊어지지 않는 현란한 롱테이크뿐 아니라 유머와 냉소가 가득한 대사와 화려한 헤어스타일 또한 관객을 매혹할 요소다.
<학교는 끝났다>를 만들었던 프랑스 감독 세바스티앙 마르니에의 <악의 기원>은 한 여성의 신분 상승을 위한 절박한 투쟁을 그리는 스릴러다. 어머니와 자신을 버리고 떠난 아버지가 엄청난 부호라는 사실을 알게 된 중년 여성 스테판은 무작정 아버지 세르주를 만난다. 스테판은 아내와 딸이 실은 세르주를 그닥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 틈 안으로 끼어들려 애쓴다.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리플리』나 루스 렌들의 『활자 잔혹극』을 떠올리게 하는 이 영화는 현대의 계급 문제와 가족의 딜레마를 건드린다.
튀니지 유세프 셰비 감독의 <아슈칼>은 표면적으로 새까맣게 타버린 채 발견된 시체에 관한 수사를 펼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루지만, 좌절되어가는 ‘아랍의 봄’ 혁명의 현실을 말하는 영화다. 튀니지 아랍의 봄 운동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2011년 무함마드 부아지지의 분신 사망 사건을 이면에 품고 있는 이 영화는 혁명 이후 튀니지 사회에 대한 냉소적인 우화이면서 개발이라는 현대의 미신을 비판하고 있다. 지난해 칸 영화제 감독주간에 초청된 이후 토론토국제영화제, 런던국제영화제 등에서 보였다.
J호러의 시대가 끝난 지는 오래됐지만 일본 곤도 게이시 감독의 <뉴 릴리전>은 이 장르의 새로운 씨앗이 될지도 모를 영화다. 자신이 돌보지 못해 딸이 사망했다고 생각하는 여성 미야비는 매춘부로 일하며 바깥 세상과 단절된 삶을 영위한다. 어느 날 미야비는 자신의 척추 사진을 찍고 싶어하는 이상한 손님을 만나게 되고 자신의 신체 사진을 찍을 때마다 딸의 영혼과 가까워진다는 사실을 느낀다. <뉴 릴리전>은 한 개인의 심연에 자리한 감정을 놀라운 공포의 세계로 조직해내는 영화다.
이탈리아 파올로 스트리폴리 감독의 <공포의 비>는 호러영화의 겉모습을 갖고 있지만 사실은 가족에 관한 이야기다. 언젠가부터 로마에 비가 내리면 지하에서 올라오는 흰 연기를 맡은 사람들은 자신만의 공포를 체험하게 되며 마치 좀비와도 같은 존재로 돌변하기 시작한다. 이 연기는 엄마의 사망 이후 계속 긴장 상태에 있는 모렐 가에도 같은 영향을 미친다. 가뜩이나 분노를 조절 못하는 아들과 그를 억제시키지 못하는 아버지는 비가 오는 가운데 엄마 / 아내와 조우하게 된다.
지난해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처음 소개된 뒤 비평가들의 극찬을 받은 미국 타이 웨스트 감독의 <펄>은 전작인 슬래셔 〈X〉의 프리퀄로 불리지만, 캐릭터 묘사부터 스타일까지 완전히 다른 영화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던 무렵이자 ‘1918년 인플루엔자'가 세상을 공포에 몰아넣던 바로 1918년을 배경으로 하는 이 영화는 시골 마을을 벗어나 할리우드 뮤지컬의 주인공이 되고 싶어하는 주인공 펄의 간절한 욕망과 집착에 집중한다. 전통적 호러 장르보다는 더글러스 서크 풍 멜로드라마나 <오즈의 마법사>가 연상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감독과 대본 작업까지 함께 한 미아 고스가 보여주는 괴력의 연기가 압도적이다.
프로그래머 문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