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국제영화제의 ’국제경쟁‘ 섹션에서는 첫 번째 혹은 두 번째 장편영화를 연출한 감독들의 작품 중에서 아시아 최초로 상영되는 작품을 대상으로, 국내외 다섯명의 예심위원들의 예심을 거쳐 선정된 열 편의 작품이 상영된다. 특히 올해는 81개국에서 747편이 출품되어 24회 604편에 비해 143편이나 증가하며 역대 최다를 기록하였다. 전체적인 경향에서 눈에 띄는 점을 꼽자면, 코로나 팬데믹 시기를 겪으며 제작된 작품들이 많았다는 점이다. 팬데믹 이전에 기획했던 영화들도 팬데믹으로 인해 제작기간이 늘어날 수밖에 없었고, 적은 수의 출연진, 최소한의 로케이션 등 제작환경의 한계를 보여준 작품들이 많았다. 하지만 그런 어려운 환경에도 불구하고 자신만의 영상 언어로 세상을 바라보고 표현하려는 노력을 기울인 창작자들이 많았다는 점에서 출품한 모든 감독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대만의 로 이샨 감독의 장편 데뷔작 〈눈이 녹은 후에〉는 네팔로 트래킹을 떠난 감독의 친구 천이 조난으로 세상을 떠나며 시작되는 다큐멘터리이다. 감독은 친구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네팔로 떠나 천의 흔적을 따라 걸으며 친구와의 추억을 곱씹고, 그러면서 관객은 이들의 여정이 겹쳐지는 과정을 보게 된다. 또 한 편의 다큐멘터리 〈거리의 소년 사니〉는 헝가리의 두 젊은 감독이 길거리 캐스팅으로 섭외한 여덟 살 소년 사니를 10년 가까운 시간 동안 기록한 작품이다. 천방지축으로 날뛰던 거리의 소년이 여자친구를 사귀고, 어처구니없는 사고로 사람을 죽게 만들면서 법정에 서는 장면까지, 한 소년의 성장 영화가 강렬한 영상에 담겨있다.
성장 영화는 극영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프랑스의 배우이자 감독인 장 밥티스트 뒤랑의 장편 데뷔작 〈쓰레기장의 개〉는 남프랑스의 작은 마을에 사는 두 친구의 우정과 성장을 그린 작품이다. 미랄레스는 별 이유 없이 친구를 개(도그)라는 별칭으로 부르며 면박 주고, 짓궂게 대하지만 둘의 우정은 아슬아슬하게 계속된다. 하지만 엘자라는 여성이 등장하며 도그가 그녀와 사랑에 빠지자 두 친구의 우정에도 균열이 생긴다. 데뷔작이라고 믿기 어려운 연출력과 ‘프론트라인’ 섹션에 소개되는 〈야닉〉에서도 주연을 맡은 라파엘 케나르의 연기가 돋보인다. 지난해 ‘월드시네마’ 섹션에서 소개된 〈트렌케 라우켄〉(2022)의 프로듀서였던 아르헨티나의 잉그리드 포크로펙이 장편 데뷔작 〈메이저 톤으로〉의 감독으로 전주를 찾는다. 아버지와 둘이서 살고 있는 열네 살 소녀 아나는 어릴 때 당한 사고로 팔에 금속판을 달게 되었는데, 이상한 금속성 신호를 감지하고 신호음을 악보에 기록한다. 그러다 아나는 그 신호가 모스 부호 같은 어떤 메시지라고 판단하고 비밀을 풀기 위해 노력한다. 음악과 비밀 메시지, 그리고 겨울날에 관한 한 소녀의 환상적인 성장 이야기이다. 역시 노르웨이의 로렌스 페롤 감독의 데뷔작 〈연습〉은 기후 활동가이자 트럼펫에 재능이 있는 열여덟 살 소녀 트리네의 이야기이다. 트리네는 오슬로 오페라 하우스에서 열리는 트럼펫 오디션에 초대되지만, 집이 있는 외딴 로포텐 제도에서 수도 오슬로까지 1,500km가 넘는 거리를 가야 한다. 비행기로 이동하는 것을 거부하는 트리네는 자신의 원칙을 지키기 위해 히치하이킹으로 오슬로로 향하지만, 이 무모한 여정을 진행하며 그녀의 음악에 대한 열정과 환경 이상주의는
시험받게 된다. 촬영감독 출신인 싱가폴의 숀 네오 감독의 데뷔작 〈끝없는 기다림의 날들〉은 더 큰 의미를 갖는 삶을 찾아 고향 홋카이도를 떠나 싱가폴로 향한 일본 여성 미쓰에가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일본으로 돌아가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보여준다. 여태 외면해 왔던 과거의 삶과 마주하게 된 미쓰에를 연기한 반자이 미쓰에 배우의 매력적인 연기를 만날 수 있다.
한편, 우크라이나 출신 감독이 만든 두 작품도 주목할 만하다. 〈돈바스: 최후의 결전〉(2019)으로 이미 알려진 이반 팀첸코 감독의 두 번째 장편 〈양심수 무스타파〉는 1980년, 구소련 체제에서 탄압받고 차별받으며 정치범이 되어 고향에 가지 못했던 크림반도 출신 타타르인들의 이야기이다. 타타르인들은 구소련이 붕괴되고 나서야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지만, 2014년 러시아가 다시 크림반도를 점령하자 쫓겨나고 말았다. 과거 역사를 통해 러시아의 만행을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다. 그리고 필립 소트니첸코 감독의 장편 데뷔작 〈팔리시아다〉는 1996년 우크라이나의 사형제도가 폐지되기 5개월 전, 형사와 법의학 정신과 의사인 두 친구가 살인 사건을 수사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로, 국가가 저지르는 폭력의 야만성과 두 명의 조사관의 일상에 가득 찬 소외감을 다큐멘터리 같은 영상을 통해 효과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밖에 베트남의 팜응옥란 감독의 데뷔작 〈쿨리는 울지 않는다〉는 한때 노동자 수출로 동독에서 일했던 은퇴한 근로자 레이디 M의 삶에 닥친 답답한 여름날을 몰입감이 배가되는 흑백화면과 시적인 연출로 다룬다. 역시 스페인의 라우라 페레스 감독의 데뷔작 〈불변의 이미지〉는 스페인 남부의 시골 마을에서 십 대 소녀 안토니아가 한밤중에 아기를 버리면서 시작되는 작품으로 친숙한 멜로드라마와 영화적 언어의 탐구를 결합하여 매우 특별한 상상력을 보여준다. 두 작품 모두 여러 국제영화제에서 호평을 받은 작품이기도 하다.
프로그래머 전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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