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경쟁’으로 상영되는 작품들을 보고 있노라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장소’이다. 집에서 살지 못한 채 보호시설을 떠돌아야 하는 아홉 살 소녀 베니가 머무는 시설들(<도주하는 아이>), 새로운 인생을 꿈꾸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 스페인 여성 레오노르가 살아가는 런던(<엄마에게로의 여행>), 베를린의 작은 아파트(<서른>), 이주노동자가 몸을 누이는 작은 방(<내일부터 나는>), 70년대의 중국 도시들(<숨 가쁜 동물들>), 캄보디아 프놈펜의 철거되는 화이트 빌딩(<지난밤 너의 미소>), 이민자들의 분노와 정치적 현실이 교차하는 코펜하겐(<덴마크의 자식들>), 내전 이후 상처로 어우러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마을들(<스톤 스피커>), 대만 남부의 일상적 풍경들(<오홍 마을>), 브라질 외곽마을(<안식처>) 그리고 교도소에서 나온 인물의 현실 공간(<이노센트>) 등. 열한 편의 영화에 등장하는 장소는 매우 일상적이지만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일상의 공간이지만, 이곳은 이민자들에게, 감옥에서 나온 사람들에게, 안식처를 구하는 사람들에게, 철거민들에게 과거의 장소적 의미를 이탈하는 ‘비장소’가 되어버린다. 영화는 그곳에서 살아가고 견뎌야 하는 사람들을 보여준다. 그들에게는 사건이 있고, 사연이 있다. 그리고 그들은 삶을 이어가기가 쉽지 않은 현실의 무게를 견뎌야 한다. 그러므로 이 장소들은 ‘비장소’인 동시에 우리의 현재를 들여다보게 하는 현실의 거울이다. 기꺼이 마주해야만 하는 영화적 장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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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전주국제영화제 ‘한국경쟁’에 출품된 104편의 장편영화들은 대다수가 한국사회의 미래에 대한 젊은 세대의 분노와 좌절을 담은 최근 몇 년의 독립영화 경향을 잇는다. 그 가운데 선정된 10편의 경쟁작들은 그런 반복되는 흐름 속에서 자기만의 가치, 감성으로 비감한 현실에 맞서는 영화들이다.
동명의 단편을 장편으로 확대해 목표를 향해 돌진하는 인물의 모습을 유쾌하면서도 슬픈 엇박자의 코미디 리듬으로 그려낸 <뎀프시롤(가제)>, 이혼을 목전에 둔 어느 가정의 이야기를 소재로 아이의 감정을 생생하게 포착한 <흩어진 밤>, 불감증을 겪는 여성 주인공의 일상생활에 흐르는 감정의 저류를 예민하게 담은 <리메인>, 미국을 무대로 한국의 청년이 현지 생활에 적응하며 대면하는 불길한 범죄적 환경을 다룬 <애틀란틱 시티>, 시한부 삶의 마지막 나날이라는 전형적인 소재를 취하면서도 몽환적이고 낙관적인 기운이 인상적인 <굿바이 썸머>는 서로 다른 개성을 풍긴다. 지난해 ‘전주프로젝트마켓(JPM)’ 지원작인 <욕창>은 몸이 부식되는 연로한 환자를 둔 집안에서 벌어지는 애증의 서사를 통해 삶의 부조리를 응시하며, 또 다른 지원작 <이장> 역시 각자 절박한 삶의 골목에 몰린 가족 구성원들 사이의 다툼과 애정이 교차하는 모습을 담는다. <파도를 걷는 소년>은 지난해 <내가 사는 세상>으로 한국경쟁에 진출한 최창환의 두 번째 연출작이며 전작보다 훨씬 강인한 시선으로 불우한 사회에서도 꿈꾸고 행동하는 청춘의 열망에 초점을 맞춘다. 마지막으로 <이타미 준의 바다>는 지난 몇 년간 뛰어난 다큐멘터리를 지속적으로 발굴, 배출한 전주국제영화제의 전통을 이어줄 수려한 작품이다. 저명한 재일교포 건축가의 삶과 예술적 성취를 특정 공간에 대한 기억을 통해 카메라로 남긴다. 또 한 편의 경쟁 진 출 다큐멘터리인 <다행(多行)이네요>는 대안적인 공동체를 모색하면서 자잘한 좌절과 실패를 겪으면서도 삶에의 긍정을 놓치지 않는 젊은이들의 모습을 호쾌하게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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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전주국제영화제 ‘한국단편경쟁’에 는 총 1,026편이 출품되었다. 지난해보다 10편가량 늘어난 작품 수는 예기치 않은 발견의 즐거움을 높여주었는데, 이 작품들을 시사하며 총 네 명의 심사위원이 1차 예심으로 고른 82편을 놓고 수석 프로그래머를 포함한 다섯 명이 토론을 거쳐 최 종 26편을 선정했다.
이번 한국단편경쟁의 가장 두드러진 경향은 여성이나 청년들의 사회적 위치를 고민하고 각자의 발언으로 표출하는 영화들에서 찾을 수 있다. 단지 고민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허용하지 않는 개인의 개별적 욕망을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에 관해 기발한 방식으로 이야기하는 영화들이 많았다. 피상적인 과시적 도덕주의를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진솔하게 자신이 속한 세대의 고민을 드러내는 가운데 타자와의 연대와 공생을 모색하는 영화들은 한국 단편영화의 미래를 밝게 전망할 수 있는 단초일 것이다.
그밖에 올해는 유독 아이들이나 중고생들의 시선으로 세상의 이치와 관계를 바라보는 영화들의 약진도 특기할만하다. 이 단편영화들은 좀처럼 볼 수 없었던 참신한 설정, 독보적 캐릭터 혹은 탁월한 심리 묘사가 돋보였다. 문학적 감수성과 영화적 상상력을 결합한 작품들도 다수 선정되었다. 한편, 이런 세 가지 경향과는 별개로 많은 단편영화가 답습하는 패턴에서 벗어나 비상한 결기와 박력으로 독특한 이야기를 담은 영화들도 적지 않았다. 상당수의 단편영화에서 아직 기성의 문법에 영향받지 않은 새로운 스타일과 관객의 취향에 아부하지 않는 대결 정신을 발견한 것은 희망적인 징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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