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각국에서 제작된 다양한 장르의 영화들을 만날 수 있는 월드시네마는 ‘영화제 프로그램의 허리’를 맡고 있는 중추적인 섹션으로 올해는 지난해보다 4편 늘어난 23편의 작품이 관객과 만난다.
우선 <인력자원부>로 제1회 전주국제영화제에 함께했고, 제14회 영화제에서는 <폭스파이어>로 개막작의 주인공이 된 로랑 캉테의 신작 <아르튀르 람보>가 소개된다. 주목받던 신예 작가가 과거 SNS에 남긴 혐오 발언으로 인해 순식간에 모든 것을 잃어가는 모습을 그린,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다. 일본에서 활동 중인 재일교포 3세 이상일 감독 역시 오랜만에 나기라 유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신작 <유랑의 달>을 선보인다. 이 작품은 특히 홍경표 촬영감독이 참여해 멋진 영상을 만들어냈다. 역시 일본 요시노 고헤이 감독의 작품 <대결! 애니메이션>은 두 편의 신작 애니메이션이 숨 막히는 시청률 경쟁을 해나가면서 벌어지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담고 있다.
아르헨티나의 두 감독이 연출을 맡은 <크레이지 컴페티션>은 재벌 회장이 자신의 이름을 남길 영화를 제작하기로 하고, 국제영화제에서 상을 휩쓴 잘나가는 감독 롤라(페넬로페 크루스)에게 영화 제작을 의뢰하면서 시작된다. 페넬로페 크루스뿐 아니라 안토니오 반데라스, 그리고 오스카르 마르티네스 같은 배우들의 열연을 즐길 수 있다. 역시 아르헨티나 작품 <중세 시대의 삶>은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록다운된 한 가정의 이야기를 담고 있고, 2022 암스테르담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의 개막작이었던 <네 개의 여행>은 중국의 한 자녀 정책으로 인해 외국으로 보내진 주인공이 직접 메가폰을 잡고 뿌리를 찾는 여행을 하게 되는 과정을 흥미롭게 보여준다. 또한 필리핀 작품 <레오노르는 죽지 않는다>, 홍콩 작품 <바바리안 인베이전>, 중국의 <버진 블루>, 그리고 이란의 <길 위의 가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아시아영화들이 상영된다.
올해는 음악과 관련된 작품들도 여러 편 상영되는데, 초기 탱고를 자리 잡게 했던 카를로스 가르델과 라이벌 구도를 형성했던 전설적인 탱고 가수 이그나시오 코르시니의 전기영화부터 서아프리카 섬나라 카보베르데 출신의 세계적인 가수 세자리아 에보라의 감동적인 다큐멘터리 <세자리아 에보라, 삶을 노래하다>, 역대 가장 많은 음반을 판매한 연주자이자 현존하는 가장 유명한 재즈 음악가인 케니 지에 대한 여러 시각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리스닝 투 케니 지>, 그리고 빌 에번스와 함께 가장 널리 알려진 재즈 피아니스트 오스카 피터슨의 삶과 음악을 담은 다큐멘터리 <오스카 피터슨: 블랙+화이트>까지 다양한 장르의 음악가들을 다룬 작품들이 상영될 예정이다.
글_전진수 프로그래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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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우리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한 체코 작가의 소설이 큰 충격과 함께 출판계를 강타했다. 그리고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는 밀란 쿤데라의 대표작은 필립 코프먼에 의해 영화화되어 <프라하의 봄>이라는 제목으로 국내 개봉까지 하게 된다. 그리고 1988년 쿤데라의 작품을 처음 소개했던 출판사는 그로부터 25년이 지난 2013년, 15권으로 구성된 그의 작품 전집을 프랑스에 이어 세계 두 번째로 완간하기까지 했다.
그 정도로 우리나라에서 인기가 많은 작가이니만큼 밀란 쿤데라가 음악학자이자 피아니스트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음악에 조예가 깊었다는 것도 널리 알려져 있고, 쿤데라 자신도 프라하 카렐대학교 예술학부에서 문학과 미학을 공부하다가 프라하국립예술대학의 영화학부로 옮겨 공부했다는 것 또한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대학 졸업 후에는 같은 학교에서 문학을 강의하며 밀로시 포르만, 아그니에슈카 홀란트를 비롯하여 후일 체코 뉴웨이브 영화를 이끈 감독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는 것 또한 유명하다.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영화와 연극을 위한 대본을 직접 집필하면서 무대와 영상예술에 직접적으로 관여하기도 했다.
2022년 제작된 다큐멘터리 <밀란 쿤데라: 농담에서 무의미까지>는 이 세계적인 작가의 삶과 예술 세계를 보기 드문 풍부한 자료화면과 함께 설명하는 흥미로운 작품이다. 그리고 이 다큐멘터리에 소개된, 그의 소설 또는 창작 시나리오를 영화화한 작품들을 한데 모아 상영하고픈 욕구도 자연스럽게 생겨서 1960년대에 만들어진 3편의 작품을 함께 상영하게 되었다. 1965년 작품 <누구도 웃지 않으리>는 프라하국립예술대학에서 밀란 쿤데라에게 배운 히네크 보찬 감독이 쿤데라의 단편소설을 각색하여 만든 데뷔작이고,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만큼 많은 인기를 얻은 1965년 작 『농담』을 야로밀 이레시 감독이 1968년 영화화한 <농담>은 암울한 시대에 잘못 던진 농담 한마디가 운명을 비극적으로 이끌어가는 웃지 못할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역시 밀란 쿤데라의 단편소설을 각색한 1969년 작품 <나, 슬픔에 잠긴 신>은 쿤데라 특유의 부조리와 위트, 복수와 역설이 잘 표현된 작품이다.
문학과 영화는 따로 얘기할 필요가 없을 만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지만, 밀란 쿤데라의 작품 세계에서 문학은 훨씬 더 ‘영화적’이라는 것을 1960년대 만들어진 보기 드문 세 작품과 그의 다큐멘터리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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